망각의 기술
망각의 기술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근무시간 도중 해결 못했던 무수히 많은 문제를 척척 풀어냈다. 그 상황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눈 뜨자마자 어딘가에 이번 꿈을 적어놓으리라 다짐을 했다. 그러나 기상과 동시에 모든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사라지고야 말았다. 잊고 사는 건 꿈만이 아니다. 오래전 분명 방문했던 장소, 한 때 가장 친했던 친구의 이름 등 영원하리라는 나의 믿음은 ‘망각’이라는 단어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곤 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정말 잊고 싶은 나의 실수, 나에게 상처 준 사람 등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안에 선명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기억하고 잊도록 만든단 말인가. 궁금함을 풀어줄 거라는 기대감을 품은 채 <망각의 기술>이란 책을 집어 들었다. 신경 생물학은 다분히 문과 기질을 타고난 나에게는 생소하면서도 난해한 분야였다. 나와는 전혀 다른 별에서 온 이들에게만 허락된 학문이라며 외면해 왔건만, 나도 잘 모르는 ‘나’를 연구하기에 이만한 학문도 없지 싶었다. 가장 동의하기 쉬웠던 건 망각이 인류에게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아주 단순한 활동을 할 때도 뇌는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단계를 거친다. 일례로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글자 하나하나를 힘줘 읽지 않지만, 뇌는 다르다. 무의미한 글자들의 조합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렇게 전개된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 단계는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진행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한다. 만약 모든 단계를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것이다.망각이라 하는 것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해가 쉬웠다. 이따금 어르신들이 옛날 일을 마치 엊저녁에 일어난 일 마냥 이야기하실 때가 있다. 그들에겐 최근의 일을 기억하는 일이 머나먼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것보다 어려울 때가 잦다. 왜 인류의 뇌가 그와 같은 방식의 소거를 택했는지를 연구한다면 나이 들수록 걸리기 쉬운 질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친절하게도 저자는 오래도록 기억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논했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어찌 보면 참으로 간단한 방법이 뇌 건강을 보장한다고 그는 말했다. 전자기기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류는 과거처럼 손을 많이 사용치 않게 됐다. 펜을 잡고 수첩 등에 메모를 한다거나 일기장 하나 가득 글씨를 채워 넣는 행위는 소수의 마니아에게만 각광 받는 ‘아날로그 감성’으로 불리게 됐다. 대신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영상과 소리 등을 다분히 피동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만 들여다본다거나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하는 식의 생활 패턴이 가히 긍정적이지만은 않지 싶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기억하기 위해서는 망각할 것을 주문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보르헤스, 베르디 등은 망각과 상상을 적당히 뒤섞어 오래도록 사람들이 기억할 대작을 남겼다. 치매나 알츠하이머 병을 앓는다 하여 그 인생이 이미 끝난 건 결코 아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완벽하지가 않다. 고로 나는 애써 내 자신을 설득해 보려 한다. 기억치 못할지라도 일어났던 일이 없어진다거나 내 삶이 덜 소중해지는 건 결코 아니다. 기억치 않음으로써 나는 점점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변모하고 있다. "망각은 사고하기 위해, 일반화하기 위해 필요하다."매일의 사소한 기억을 잊지 않으면, 정신은 쓸모없는 정보로 언제나 넘쳐날 것이다. 하지만 기억을 지우는 것은 냉정히 말해 애석한 일이다. 뇌는 여러 다양한 기억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고 뇌의 많은 경로를 활성화하는 수고를 들이기 때문이다. -<망각의 기술>, p63
역사적 개념과 문학적 견해, 과학 실험 결과를 결합하는 매력적인 방식으로
기억과 망각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을 이야기한다. - 제임스 맥고 캘리포니아대학교 신경생물학 교수
기억 연구의 선구자가 신경과학으로 살펴본 망각의 모든 것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짐 캐리)은 한때 사랑했으나 이제는 지긋지긋해진 연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과 헤어지기에 앞서 그녀와의 모든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기억 삭제 시술을 받던 중 의식 일부가 깨어나 자신의 ‘아픈’ 기억뿐 아니라 ‘행복한’ 기억, 남기고 싶은 ‘추억’마저 모두 지워버리는 것을 목격한 그는 결국 제발, 이 기억만은 남겨 달라 고 호소하기에 이른다.
어떤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육체적 고통까지 느껴본 사람은 한번쯤 꿈꿨을 것이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삭제하는’ 일을.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기계를 이용하거나 알약을 하나 삼키면, 나쁜 기억이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리는 일을. 또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이런 욕망도 있다. ‘중요한 사건, 아름다웠던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 열쇠 둔 곳을 잊거나, 핸드폰을 냉장고 속에서 발견하면서 ‘부디, 더 이상 기억이 흐려지지 않았으면, 온전하게 유지되었으면’ 하고 절실히 바란다.
문학 작품은 ‘완벽한 기억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소재로 삼곤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쓴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는 말에서 떨어진 뒤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기억력을 얻어 특정한 날, 하늘에 뜬 구름 모양 같은 자질구레하고 세세한 사항까지 완벽하게 기억하는 농부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머릿속에 빼곡하게 쌓이는 정보가 괴롭다. 인간에게 기억은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망각도 살아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억과 망각,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요소가 실제 인간의 뇌에서 어떻게 투쟁하는지, 우리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특정 사건을 기억하고, 또 잊는 것인지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살펴본 책 망각의 기술(원제: The Art of Forgetting, 심심 刊) 이 출간되었다.
책을 쓴 이반 안토니오 이스쿠이에르두(Ivan Antonio Izquierdo)는 기억을 저장하고 인출하는 뇌의 활동과 과정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기억 연구의 세계적 대가이자 신경생물학 분야 선구자다. 이스쿠이에르두는 주로 생물학적 기제에서 기억 과정을 설명하는 일에 초점을 뒀는데, 이를 위해 정신생물학부터 신경화학, 약리학, 신경생리학, 실험신경학에 이르는 여러 학문을 가리지 않고 복합적으로 활용해왔다. 그는 기억 응고화(뇌에서 어떤 정보가 기억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이르는 말)와 상태 의존 기억(특정 상태일 때만 인출되는 기억으로 갈증, 공포, 스트레스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부분 공포를 느끼지 않는 한 공포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살아갈 수 있다)의 인출 조절에 에피네프린, 도파민, 내인성 오피오이드 펩티드, 그리고 아세틸콜린 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최초로 밝혀냈다. 이스쿠이에르두 덕에 우리는 포유류의 뇌가 기억을 어떻게 형성하고 인출하는지, 혹은 유지하거나 소거하는지 그 분자적 기반을 알게 되었다. 또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의 기능을 최초로 구별한 인물이 그다.
이스쿠이에르두의 실험실에서 진행한 연구를 포함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최신 연구는 뉴런과 뇌 체계의 활성화가 어떻게 인간의 학습과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왔다. - 10쪽, 추천의 말 중에서
감수의 말 ― 살기 위해 기억하듯 살기 위해 망각한다
추천의 말 ― 왜 우리는 매일의 경험을 그토록 쉽게 잊을까
저자 서문
1장 우리가 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기억과 망각 | 내 소중한 기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다 | 뇌에서 벌어지는 서커스 | 기억은 어떻게 비과학에서 과학이 되었나
2장 망각의 기술
기억이란 무엇인가 |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 | 우리는 왜 잊는가 | 망각의 네 가지 기술 | 습관화, 생존에 도움을 주는 기술 | 조건 반사와 소거 | 일반화와 차별화 | 망각의 기술을 이루는 두 가지 기둥
3장 기억과 뇌
노인이 지나간 시절을 더 잘 기억하는 이유 | 작업 기억이 작동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 기억에 관여하는 뇌 영역 | 기억 형성의 핵심 요소 | 단백질을 만드는 두 가지 체계 | 합리적 판단은 생존 기술이다 | 신경전달물질과 신경조절물질의 차이 |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의 망각
4장 모든 기억은 감정을 동반한다
기억과 감정 | 기억을 부르는 호르몬 | 시냅스의 폐기와 세포 자멸 | 망각의 기술은 자산이다 | 재응고화
5장 기억을 응원하는 것들
읽기는 어떻게 기억을 오래도록 유지시키는가 | 기억 훈련 | 아무도 완전하지 않다 | 공부의 용도 | 중요한 신호와 소음을 가리는 법 | 부인과 변조 | 조작되는 거짓 기억 | 민주주의는 좋은 기억력을 필요로 한다
6장 기억의 질병
뉴런이 하는 일 | 환자 H.M.이 밝힌 것들 | 망각의 홍수 속 기억의 섬 | 우울증을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이유 | 망각 묘약의 실체 | 병아리의 각인과 인간의 두 발 걷기 | 새로운 기억의 습득 | 억압 | 치료에 이용되는 망각의 기술 | 보조기억장치 | 기억하려면 망각해야 한다
나가는 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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